【컬럼】 츠다 우메코, 일본여성교육의 선구자와 개구리 알

  • 강혁 기자
  • 발행 2021-10-12 14:29

“1871년 일본 정부가 불평등조약 개정 교섭과 서구 문화 시찰이라는 목적 아래 파견한 이와쿠라(岩倉)사절단에는 츠다 우메코(津田梅子), 나가이 시게코(永井繁子), 야마카와 스테마츠(山川捨松), 요시마스 료코(吉益亮子), 우에다 데이코(上田悌子)라는 5명의 어린 소녀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메이지정 부가 출범한지 아직 얼마 되지 않은 시기에 여성들을 외국에 유학시킨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으며 이 자체가 근대화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근대 일본 여성 고등교육의 발자취> 중에서


이와쿠라 사절단의 소녀 츠다 우메코

메이지 유신 이후 근대국가로 발돋움하던 일본에 ‘양처현모주의’, 즉 ‘좋은 아내와 현명한 어머니 담론’이 등장하게 된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일본의 근대화를 주장하던 계몽지식인 대부분이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부르짖었다. 물론 그건 여성을 위한 실천이 아니었다. 일본의 근대화를 위해서는 근대적 교육이 절실했고, 아이의 교육에는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논리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교육은 국가의 근대화를 위한 수단이었을 뿐이다.

메이지 시대, 여성의 고등교육이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국가의 발전을 이끌 남성의 교육에 어머니의 역할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1899년 공포된 고등여학교령에는 이런 당시의 분위기가 잘 반영되어 있다.

“건전한 중등사회는 오로지 남자교육으로 양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현모양처 와 함께 잘 그 가정(家)을 다스림으로써 비로소 사회 복리를 증진시킬 수 있으니, 여자교육의 부진은 현금(現今) 교육상의 일대 결점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고등여학교의 수업시간이 대부분 수신, 국어, 재봉 등의 도덕 및 실업과목으로 채워진건 당연한 일이다. 츠다 센은 농학전문가로 당시 개척사 차관이자 미국과 농학 및 여성교육문제를 논의하던 구로다 기요타카와 돈독한 관계였다. 이와쿠라 사절단에 여자 유학생을 포함하자는 구로다의 건의가 확정되자, 츠다 센은 6세에 불과하던 자신의 딸 츠다 우메코를 미국으로 유학보내기로 결심한다. 우메코와 함께 유학을 떠난 여학생들은 모두 16세 이하였다. 왜냐하면 이들이 10년의 유학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의 결혼 적령기를 고려했기 때문이다.

우메코와 함께 유학을 떠난 5명 중, 가장 연장자였던 두 명이 1년 후 유학을 포기하고, 우메코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야마카와 스테마쓰, 나가이 시게코와 함께 10년의 유학을 마치게 된다. 당시 이들은 ‘트리오’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사회에서 꽤 유명했으며 특히 우메코는 미국의 학교와 지역사회에서도 특별히 주목받았다고 한다. 우메코가 낭독한 시는 지역 신문에 게재될 정도였고, 그는 보호자 란만 부부와 함께 시인 롱펠로와 상원의원 등과 교류하며 꿈을 키워 나갔다.



우메코의 개구리 알

비록 메이지 정부에 의한 여성의 미국유학이, 남녀평등을 위한 포석은 아니었지만, 이런 조치 덕분에 일본 여성은 다른 동아시아 여성에 비해 비교적 일찍 부당한 처지를 인식하고 문제를 제기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특히 고등여학교에서 메이지 시대의 여성들은 또래의 친구를 만나 함께 여성의 문제를 이야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1892년 우메코가 일본으로 돌아왔을 당시, 일본의 상황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개척사는 해산한 상태였고, 여성고등교육 문제 또한 지지부진하고 있었다. 특히 우메코를 당황하게 만든건, 귀국 후 유학생 동료들이 모두 결혼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일본 여성은 10대 중반에 결혼을 했고, 그런 관습은 우메코에게 엄청난 사회적/문화적 압력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16세의 우메코는 10년의 유학 기간 동안 일본어보다 영어에 익숙해져, 일본과의 심리적 거리는 더더욱 멀어져 있는 상태였다.

결혼문제보다 우메코를 더욱 사로잡은 문제는, 당시 일본여성들의 사회적 처지였다. 미국에서 여성인권이 신장하던 시기를 지켜본 그에게, 일본의 정부는 무책임해보였고, 일본여성은 무력해보였다. 우메코 스스로도 차별을 감내해야 했다. 미국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남성 대부분은 일본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지만, 우메코는 적당한 직장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힘든 상황 속에서 그가 선택한 첫 직장은 가이간여학교의 임시 교사였다. 이후 우연히 이토 히로부미 가족의 영어교사가 된 우메코는, 이토의 추천으로 화족여학교의 교사를 거쳐 일본 유일의 여자고등교육기관인 도쿄고등사범학교 교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게 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유학을 떠났던 탓에 미국에서 대학교육을 받지 못했던 것을 아쉬워했던 그는, 유급 유직을 통해 1889년 브린모어 칼리지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브린모어 칼리지는 여성의 입학이 자유로웠을 뿐 아니라, 당시 학부장인 케리 토머스는 여성 최초로 취리히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물이자 페미니스트였다.


우메코는 역사, 생물학, 영문학, 화학, 경제학, 철학 등의 과목을 다양하게 이수했지만, 생물학을 전공으로 선택한다. 우메코에 대한 논문을 쓴 이은경 박사는 그가 생물학을 전공으로 선택한 이유를, “이는 당시 일본 여성에게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는, 그래서 양처현모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여학교의 과목으 로 채택될 일이 전혀 없는 분야”였기 때문으로 설명한다.

당시 브린모어 칼리지의 생물학과에는 에드먼드 윌슨, 자끄 로엡처럼 유명한 생물학자들이 포진해 있었을 뿐 아니라, 훗날 초파리 유전학 분야를 만들어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 젋은 토머스 헌트 모건이 가르치고 있었다. 우메코는 모건과 함께 개구리 알의 발생과정을 연구하기 시작했고, 이 연구는 “개구리 알의 방향성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1894년 영국에서 발행하는 학술지에 모건과 공동명의로 발표된다. 당시 대학당국은 우메코가 대학에 교원으로 남아주길 간청했지만, 그는 졸업 후 유럽의 여러 대학을 방문해 교수법 등을 배운 이후 일본으로 귀국한다.



생물학과 영어 사이에서

3년 간의 미국 재유학은 우메코가 인생의 목표를 결심하는 계기가 된다. 10년만의 유학에서 되돌아온 일본에서 혼란스러움을 느꼈던 우메코는, 일본여성을 위한 자신만의 학교를 세우겠다는 확고한 목표를 세우고, 미국 현지에서 ‘일본 여성을 위한 미국여성의 장학금’을 모금하는 등 교육개혁가로의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1892년 다시 화족여학교로 복귀했던 그는 1900년 ‘여자영학숙’을 설립했고, 이 학교는 훗날 츠다주쿠, 즉 오늘 날의 츠다주쿠대학이 된다.

우메코가 세운 여자영학숙의 교육법엔 그의 페미니스트 철학이 그대로 배어 있었다. 우메코는 일본의 여성이 처한 현실을 남성과 비교했고, 그 핵심에 일본의 여자교육이 놓여 있으며, 바로 그 교육 때문에 일본 여성이 남성의 지배 하에서 아버지, 남편, 아들에게 의존적인 삶을 살게 된다고 봤다. 특히 학교의 교과목에서 보이는 차별이 이런 차이를 고착화한다. 이런 신념하에 여자영학숙은 여성 엘리트와 전문직을 배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게 된다.

당시 우메코를 일본에서 유명하게 만들어준 능력은 그가 구사하던 일본 최고의 영어실력이었고, 이는 여자영학숙의 브랜드를 만드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생물학 전공으로 모건과 함께 논문까지 쓴 그였지만, 남성과 경쟁할 수 있는 일본 여성의 교육을 위해, 우메코는 여자영학숙에서 최고의 영어 교원을 양성하는데 집중하게 된다. 이처럼 우메코는 일본여성의 근대화를 위해 자신이 미국에서 경험했고, 또 가장 잘 할 수 있는 분야에 집중했다. 국제어인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전문직 여성의 교육, 여자영학숙은 그런 철학으로 일본 여성교육의 활로를 개척했다.

우메코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 그는 생물학자로 교육받았지만, 일본의 여자고등교육에 헌신하기 위해 영어 교육에 더 큰 힘을 쏟았다. 그는 생물학을 연구하며 미국에서 안정적인 삶을 누릴 기회가 있었지만, 일본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끌어올리기 위해 귀국길에 올랐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본 한 지인은 우메코의 삶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18세가 되기 직전에 귀국한 우메코는 흡사 타임 터널(time tunnel)을 역행해서 돌 아온 여행자(旅人)와 같았다. “문명개화”를 부르짖은 지 오래되었지만 50년 아니 100년 이상 뒤떨어진 세계로 타임슬립(time slip)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두 문화의 사이에서 즐거웠어야 할 청춘시대를 빼앗긴 데다, 일본 사회의 후진성에 대한 안타까움, 절망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를 뒤집는다면 우메코는 50년 후, 혹은 100년 후에 실현될 세계를 [미리] 경험한 여행객이기도 했다.”


일본 최초의 노벨생리의학상 수상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한 여성 과학자는, 그렇게 일본 여성 전체의 공익을 위해 교육자로 평생을 바쳤다.


<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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