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재일조선인 이야기

  • 강혁 기자
  • 발행 2021-11-01 18:24

이번에 다룰 이야기는 일본과 관련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우리’의 이야기에 가깝다.


재일조선인


디아스포라, 주변인, 경계인 등의 말은 학계에서 재일조선인을 말할 때면 으레 나오는 용어이다. 하지만 이번 이야기에서 그러한 용어들은 필요하지 않다. 재일조선인에 관한 질문과 대답은 모두 우리 각자의 마음속에 있기 때문이다.

용어부터 정리할 필요가 있다. 재일교포나 재일동포와는 같은 듯 다르다. 일본에서 ‘재일조선인’은 역사성을 갖는 학술 용어로서도 정착된 말이지만, ‘조선인’이라는 말에서 부정적인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단순히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만은 아니지만, 최근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그 대신 ‘재일코리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까지 필자는 세 문장 안에 네 개의 용어를 썼다. 재일조선인, 재일교포와 재일동포, 재일코리안. 몇 가지를 더하자면, 뉴커머(new-comer), 재일한국인, 그리고 우리가 흔히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계라고 잘못 알고 부르는 ‘조선적’(朝鮮籍)의 재일조선인도 있다. 같은 민족의 구성원을 부르는 명칭이 이렇게나 많고 복잡하다.

재일조선인은 ‘식민지 시기에 근원하고 있는 조선적 또는 한국적을 가진 일본 거주자’를 말한다. 여기에서는 ‘식민지’가 중요한 단서가 된다. 해방 전부터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 그리고 그 자녀들 및 후손만 재일조선인에 해당된다. 그중에서 한국 국적자만 따로 재일한국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며 주로 한일국교정상화(1965) 이후에 교육이나 경제활동 등을 목적으로 일본에 장기 거주하게 된 사람들은 ‘뉴커머’라고 한다. 재일교포는 조금 복잡하고 애매하다. 실제로는 한국 정부로부터 재외국민으로 인정받게 된 재일한국인만을 일컫는 경우가 많은데 법적으로 따지자면 조선적 재일조선인도 재일교포 또는 재외국민으로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아무튼 조선적 재일조선인은 우리에게는 아직은 ‘낯선’ 동포이다.

서설이 조금 길어졌는데, 이번 칼럼은 식민지 지배와 해방, 분단이라는 ‘조국’이 겪은 굴곡진 역사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있는 재일조선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또한 재일조선인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시선을 조금이라도 교정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는 기대를 가져본다.
이 이야기는 한 유명인에서 시작된다.


추성훈과 아키야마 마사히로(秋山成勲)

추성훈. 그는 재일조선인 4세로서 한국 국적을 갖고 있다가 유도 국가대표가 되기 위해서 일본으로 귀화했다. 그는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현재의 국적을 묻는다면 일본일 터이고 민족이라면 한민족이다. 아니면 ‘한국계 일본인’이라고 해야 할까? 이 질문에 필자가 굳이 답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답이 없을뿐더러 이 질문은 추성훈을 바라보는 우리들 각자의 시선을 묻고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유명인이라고 하더라도 그에 관한 진실을 넘겨짚는 무례함을 범하고 싶지는 않다. 필자는 추성훈의 가족사에 대해서 방송을 통해서 얼핏 들었을 뿐 잘 알지 못한다. 이번 이야기는 추성훈 개인에 관한 것이 아니다. 그저 추성훈이라는 유명인의 이름을 빌려 왔을 뿐, 재일조선인인 추성훈에게 투영된 한국인의 시선에 관한 이야기이다. 재일조선인은 재미교포와는 다른 스토리를 갖고 있으며 그들을 보는 시선 또한 사뭇 다르다. 추성훈에 대한 시선도, 지금이야 가족과 함께 출연한 TV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친숙한 이미지를 갖게 되었지만, 일본 귀화 후에 격투가로서 처음 한국에 알려졌을 때만 해도 그다지 곱지마는 않았다. 어딘가 낯선 재일조선인인 데다가 그에게는 일본 귀화라는 꼬리표가 하나 더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언젠가 재일조선인 이야기를 글로라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었는데 바로 그를 향한, 재일조선인에 대한 무지하고 모진 댓글들이 계기가 되었다.

재일조선인에게 일본 귀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미국 시민권을 취득한 재미교포를 대하는 시선과 무엇이, 왜 다른가? 그 대답에는 식민지 지배와 해방, 분단, 한국전쟁, 그리고 냉전의 다른 이름인 반공(反共)이 켜켜이 쌓여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재일조선인을 현대사의 피해자로 그릴 생각은 없다. 다만 재일조선인이 남북한 어디로도 귀환하지 않고 일본에 남는 선택을 한 데에는 분명 역사의 힘도 작용했다.

재일조선인은 누구이며, 왜 한국과 일본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못하면서, 그리고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은근하거나 때로는 노골적인 불편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일본에서 견디며 살아가고 있는가?


왜 이승만은 재일조선인의 귀환을 거부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재일조선인이 누구인지, 그 복잡다단한 역사를 짧게나마 소개하고자 한다. 그것을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은 덧셈 뺄셈을 하는 것이다. 해방 당시를 기준으로 일본 거주 조선인은 약 200~230만 명이었는데 이들 대다수는 식민지 시기에 저임금 노동자로 또는 강제징용으로 일본에 건너간 사람들이었다. 그중 상당수가 해방 직후에 미군정으로부터 허락된 ‘푼돈’만 들고 한국으로 귀국했고 나머지 50~60만 명 정도가 일본에 남는 선택을 했다. 여기에 그 이후 일본에 드나든 ‘조선인’을 가감해야 한다. 예컨대 해방 직후의 혼란과 가난 속에서 일본 거주를 선택한 가족을 찾아 한국에서 일본으로 ‘밀입국’한 사람들, 제주 4.3사건 과정에서 군경의 ‘학살’을 피해서 일본으로 밀입국한 수만 명의 사람들, 그리고 이들을 밀입국자로 규정한 미군정과 일본 정부에 의해 다시 한국으로 강제송환을 당한 수만 명의 사람들과 나머지 검거되지 않고 일본에 남아 살게 된 사람들, 한국에서는 ‘북송’으로 알려진 ‘귀국사업’으로 북한으로 건너간 약 9만 3천 명의 사람들, 이들을 더하고 빼면 된다. 세월은 흘러 재일조선인 1세, 2세가 사망하고 차별을 피해서 일본으로 귀화하는 사람들도 늘어서 현재의 약 30만 명에 이른다. 물론 이 30만 명에는 뉴커머나 유학생, 주재원 등은 포함되지 않으며 ‘특별영주자’ 자격으로 일본에 거주하는 사람만을 의미한다.


다시 앞의 질문으로 돌아가 보자. 1950년대에 재일조선인들은 대부분 ‘생활보호대상자’로서 가난에 허덕이고 있었던 데다가 일본 정부로부터는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받았다. 무엇보다 재일조선인은 미군정이 끝나고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게 되면서 외국인 신분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매년 비자를 갱신해야 하는 불안하고 불편한 삶을 살아내고 있었다. 당연히 한국으로 돌아갈 법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는 재일조선인의 한국 귀환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귀찮은’ 존재였던 재일조선인의 송환을 타진하는 일본 정부에게 이승만 정부는 송환 대상자에 대한 보상을 요구했고, 일본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일본이 거부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한일 간 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일이었기에 일본이 보상하지 않는다는 것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재일조선인을 보상 없이 받아들인 북한의 선택과 비교해 보면 이승만 정부가 ‘거부’한 것이 맞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복잡한 사연이 있었다. 좋게 해석하면 경제적인 이유를 들 수 있다. 대다수의 재일조선인이 일본에서 생활보호대상자였기 때문에 일본이 보상하지 않는 한, 당시 궁핍한 한국의 경제 사정으로는 그들을 받아들일 여력이 없었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애초 이승만 정부는 재일조선인을 겉으로는 ‘국민’이라고 부르면서도 정작 그들의 생활고나 차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것은 한반도의 분단, 한국전쟁, 냉전과 무관하지 않다.


해방 직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한국 사회도 좌우로 갈라져 대립하고 있던 와중에 재일조선인 사회도 좌우로 분열되기 시작했다. 한반도의 분단이 재일조선인 사회로 그대로 옮겨진 것이다. 재일조선인은 처음에는 스스로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결성했는데 조련이 점차 좌경화하자 우파는 조련에서 나와서 따로 재일조선인거류민단(민단)을 조직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조총련과 민단의 시작이었던 셈이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재일조선인의 70% 이상이 조총련에 적을 두고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무엇이 선후인지는 모르겠지만, 앞에서 소개한 것처럼 재일조선인 사회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면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재일조선인 사회의 좌우대립, 조총련 우세 상황을 목격한 이승만 정부가 민단계까지도 포함해서 재일조선인 전체를 불신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여기에서 당시 재일조선인들이 남북한 각각의 이데올로기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한 것은 아니라는 점은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데올로기가 원인이라기보다는 ‘조국’이 보여준 관심의 차이가 그들이 조총련을 선호하게 만들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이유야 어떻든 북한은 전후 복구로 빠듯한 경제 형편에도 재일조선인들에게 민족교육 원조나 장학금 명목으로 7억 엔 정도의 당시로서는 거금을 지원했다. 재일조선인들이 조총련에 기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러한 분위기는 자신들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 한국 대신에 북한으로의 귀환을 선택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른바 ‘북송’(북한은 ‘귀국’, 일본은 ‘귀환’으로 부른다)의 시작인 동시에 조선적 재일조선인의 애달픈 삶의 시작이다.


‘조선적’ 재일조선인은 대한민국 ‘국민’인가?

현재 조선적 재일조선인은 한국적 재일조선인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하다. 전체 약 30만 명 중 조선적 재일조선인은 약 2만 7천 명 정도로 1950~60년대에 비하면 큰 폭으로 줄었다. 한일국교정상화와 동시에 체결된 ‘재일교포 법적지위 협정’에 의해 한국적 재일조선인에게 영주권을 부여하게 되면서 조선적에서 한국적으로 바꾼 재일조선인들이 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탈냉전기에 들어서면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고 북일관계가 최악의 상태로 치달으면서 조선적 이탈은 가속화했다. 특히 현재 조선적을 갖고 일본에서 살아가기에는 보이지 않는 멸시와 차별은 버거웠을 터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조선적을 유지하는 재일조선인은 북한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조선적 재일조선인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정체불명의 ‘조선’을 국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법적으로는 무국적자에 해당한다. 일본이 패전하고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회복할 때까지 모든 재일조선인에게는 편의상 조선이라는 임시 국적이 주어졌다. 그 후 한국적을 선택한 사람들은 따로 ‘재일한국인’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재일조선인 사회도 두 개의 ‘적’으로 분단되었다.


요즘에는 많이 알려졌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조선적의 ‘조선’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앞서 말했듯이 ‘조선’은 분단되기 전의 한반도 출신이라는 의미이며 특정 ‘국가’를 지칭하는 말이 아니다. 게다가 재일조선인 스스로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일 미군정으로부터 주어진 일종의 기호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조선을 분단되지 않은 조국으로서 기억하기에 무국적자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반쪽에 불과한 한국 국적으로 바꾸지 않았다.


물론 조선적 재일조선인 중에는 지금도 북한의 ‘공민’임을 자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그중에는 북한으로 간 가족의 안위를 염려하여 어쩔 수 없이 따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조총련 간부를 아버지로 둔, 그리고 북송으로 북한으로 건너 간 오빠 가족을 둔 양영희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3부작은 이러한 조선적 재일조선인의 복잡한 심경을 잘 그려내고 있다. <디어 평양>(2005), <굿바이 평양>(2011), <가족의 나라>(2012). 대다수의 조선적 재일조선인에게 북한은 조국이 아니라 남한과 마찬가지로 언젠가 홀연히 찾아올 통일의 반쪽짜리일 뿐이다.


‘그럼에도’ 조선적 재일조선인은 여전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우를 받지 못한다. 재외국민이 한국의 국정 선거에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은 2012년에 이르러서이다. 그마저 조선적 재일조선인은 대상 외로서 행정적으로는 재외국민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들은 일본과 한국, 그 어디에서도 참정권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 한국 방문도 그들에게는 번거롭고 때로는 모욕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다. 매번 한 회만 사용할 수 있는 ‘임시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하는데, 그마저도 ‘신원’을 보증해야 하는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한다.


북한의 공민임을 자처하는 일부 조총련 간부를 제외하면, ‘왜 조선적을 한국적으로 바꾸지 않느냐’는 질문은 무례한 것이다. 조선적 재일조선인도 ‘국가’를 빼앗겼던 ‘조선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기에 그들의 조국이 ‘조선’이 되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어쩌면 조선은 한반도의 미래의 이름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조선적 재일조선인들이 조선적을 유지하는 이유로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하다.

추성훈에 관한 질문을 다시 던져본다. 추성훈은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정작 그에게는 무의미한 질문일지도 모른다. 그에게 국적은 거추장스러운 덧옷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앞에서 소개한 양영희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라(國)는 국가가 아니라 ‘곳’이다.” 누군가 재일조선인에게 ‘당신의 조국은 어디인가?’라고 묻는다면, 많은 재일조선인들은 대답은 다를지 몰라도 분명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이것이 재일조선인들이 ‘앓고’ 있는 ‘조국 알레르기’이다. 그래서 추성훈은 이렇게 답할지도 모른다.

“나의 국적은 한국도 일본도 아닌 ‘나’입니다.”



<필자> 김백주 박사
- 前 도쿄대 대학원 총합문화연구과 지역문화연구전공 조교수
- 現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선임연구원, 서강대・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강사
- 저서 <한반도냉전과 국제정치역학, 아카시쇼텐>
- 한겨레신문 등 다수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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