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컬럼】 일본 사회진화론의 두 갈래

  “사회진화론은 이른바 우승열패.약육강식.생존경쟁 등으로 상징되는 단순한 슬로건이 아니었다. 근대전환기 동아시아를 강타한 최초의 서양발 사회사상이었으며, 당대 근대화 담론의 향방을 가늠하는 사상의 저류였다.” 유봉희

  19세기 동아시아 3국은 모두 서구에 의한 근대화를 경험했다. 흔히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사회는 ‘과학’과 ‘민주’를 서양이 우월하다는 증거로 받아들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19년 중국에서 벌어진 5.4 신문화운동의 구호가 바로 과학과 민주였던 것도, 이 두 개념이 동아시아 3국의 지식인사회가 서양제국주의 세력의 침탈 속에 깨달은 자강의 핵심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당시 동아시아 지식인사회는 물론 정치와 사회제도 전반을 뒤흔든 서양의 사상적 발명품은 따로 있었다. 바로 ‘사회진화론’이다.



사회진화론의 동아시아적 여정


  사회진화론은 단순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다양한 학설과 사회운동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동아시아 사회진화론의 수용을 연구해온 우남숙은 19세기말 서양과 동아시아 모두를 강타했던 사회진화론을, “사회의 장기적 변화를 진화 혹은 진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이론의 총칭”으로 정의한다. 물론 동아시아에 크게 영향을 미친 사회진화론의 주창자로 흔히 허버트 스펜서와 찰스 다윈이 거론되고, 이 둘의 이론이 가장 영향력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스펜서가 다윈의 자연선택 이론을 사회의 진화에 외삽한 것이 사회진화론이라는 이야기는 오해에 가깝다.

  스펜서는 다윈의 계승자가 아니다. 스펜서는 다윈에게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다윈 또한 스펜서의 적자생존 개념이 자신의 자연도태 개념보다 정확하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즉, 다윈과 스펜서는 “모두 비슷한 시기에 자연과 사회를 통합하는 최신과학으로서 사회진화론의 사상적 선구자”로 불릴만한 자격이 있다. 이미 맬서스를 포함한 선행 진화론자들에 의해 ‘생존경쟁’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져 있었던 당시, 다윈은 우연에 의한 통계적 확률법칙으로 진화의 과정을 설명해냈다면, 스펜서는 “자연과학의 인과법칙이 도덕과 정치에도 공통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콩트의 실증주의적 전통 속에서, 자유방임을 주장하는 개인주의적 사회진화론에서 출발해 적자생존이라는 개념을 통해 이를 부족과 국가 단위로 적용시켰다. 즉, “다윈의 ‘자연선택’과 스펜서의 ‘적자생존’은 본질적으로 같은 의미이지만”, “다윈은 우연한 변이에 의한 진화적(evolutionary)적 변화 (variation)관점이며, 스펜서는 진보(progress)적 발전(develope)관점이라”는 차이가 있는 셈이다.

  사회진화론을 가장 먼저 받아들인 국가는 일본이었다. 이미 1870년대 메이지시대 일본의 대다수 지식인은 사회진화론에 매몰되어 있었다. 일본에 전해진 사회진화론은 초기엔 다윈과 스펜서의 것이었고, 특히 스펜서의 저작들이 메이지시대 지식인들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메이지로쿠샤의 일원이자 도쿄대 초대 총장이 되는 가토 히로유키는 다윈과 스펜서를 넘어 자신만의 독특한 사회진화론을 구축해나갔다. 특히 그는 일본 독일학의 아버지라 불릴 정도로 독일의 학문에 크게 영향을 받았고 일본에 독일학문의 영향을 깊게 남겼는데, 독일 유학 당시 영향을 받은 에른스트 헤켈의 진화론은 물론 블룬칠리의 ‘민족국가론’을 그의 사회진화론에 접목시켰다.

  메이지 초기 자유민권운동에도 가담했던 가토는 독일학의 영향 속에 1882년 <인권신설>을 발표하고, “모든 인간이 선천적으로 평등한 권리를 갖는다는 천부인권을 거부”하고, “생존경쟁과 자연도태의 법칙을 통해 사회구성원 간의 우열”이 존재함을 증명하려 했다. 가토의 사회진화론은 점점 국가주의와 권위주의의 형태를 띄어 갔고, 1880년대 혼란스럽던 국제정세 속에서 가토는 물론 철저한 자유민권운동가였던 후쿠자와 유키치 또한 ‘탈아론’으로 사상적 전향을 보여주게 된다.



사회주의적 사회진화론의 등장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 가장 빠르게 서양을 받아들인 일본지식인사회가 사회진화론을 통해 서양의 제도와 학문을 수용함과 동시에 중국과 일본을 타자화해 서구제국주의세력의 일부로 가담하는 일을 정당화했다면, 중국의 지식인사회에서 사회진화론은 완전히 다른 맥락으로 수용될 수 밖에 없었다. 사회진화론이 적극적으로 수용되는 1880년대 중국은, 이미 서구 부강의 원인을 기술문명에서 찾는 양무운동의 중체서용론이 지식인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다. 문제는 양무운동의 성과가 중국을 전혀 부강하게 하지도, 서양으로부터의 독립을 이루어내지도 못한다는데 있었다.

  이 시기 영국유학을 체험했던 옌푸는 서양의 근대 자연과학의 기초를 철저히 배워, 다윈과 헉슬리의 학설을 중국에 <천연론>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해 지식인사회를 공명시켰다. 이 책에서 옌푸는 노장사상 등 중국철학의 개념으로 사회진화론을 번역했고,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의 영향 속에, 가토 히로유키의 우승열패라는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인간은 피동적으로 자연을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라, 자연과 투쟁하는 존재”라는 헉슬리의 논증을 계승발전시켰다. 즉, 옌푸는 “서양의 힘의 근원이 단순히 무기나 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진화론과도 같은 서양사상에 있다”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동시에 “근대화에 관한 문제의식과 이 과제에 대응”하는 논리를 만들어냄으로써 이후 사회진화론을 받아들이는 량 치차오와 후스 등의 변법운동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당시 조선은 “내부로는 개혁파와 보수파의 권력투쟁”으로 혼란스러웠고, “밖으로는 일본의 침략에 직면해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진화론의 수용은 조선에서 잠복기를 거치게 된다. 조선 최초의 미국유학생 유길준은 게이오의숙 유학을 통해 후쿠자와 유키치의 영향력 속에서 <서유견문>을 발표했고, 이 책에서 인류역사를 미개화, 반개화, 개화 등의 3등급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나라를 잃은 후에야 유길준은 사회진화론을 드디어 반성적으로 사유하게 됐다. 물론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유길준처럼 미국유학파였던 윤치호는 진화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조선을 미개한 국가로 규정하고 결국 친일파의 길을 걸었다.

  사회진화론을 옌푸의 방식으로 전회했던 조선의 지식인들은 유길준이나 윤치호 등의 유학파가 아니라 박은식, 신채호, 장지연 등의 비유학파 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역에서 ‘하늘의 질서를 본받아 자신을 수항해는 군자의 기상’을 가르키던 단어인 ‘자강’을 사회진화론의 맥락 속에서 조선 개혁의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사회진화론적 세계관을 수용해 우승열패 적자생존의 세계질서를 인식했고, 조선이 이런 경쟁사회 속에서 교육과 식산의 증진을 통해 자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토쿠 슈스이, 아나키스트의 사회진화론

  옌푸와 신채호 등의 중국과 조선의 지식인이 당시 전세계를 휩쓸었던 사회진화론을 변용해 수용한 이유는, 그들이 서 있는 땅이 가토 히로유키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였기 때문이다. 중국과 조선은 서양세력은 물론 일본으로부터도 위협받고 있었다. 메이지유식 이후 서양제국주의 세력과 맞설만큼 빠르게 힘을 키운 일본사회의 지식인 대부분은, 가토 히로유키와 비슷한 길을 걸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서 결코 자유롭지 못한 지식인의 특성상, 이 시기 일본에서 사회진화론을 수용하면서도, 국가주의와 권위주의를 거부한 사상가가 나타났다는 점은 일본 사상사적 맥락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다.

  고토쿠 슈스이는 가타야마 센과 함께 일본 아나키즘의 선구자로 지목되는 인물로, 1871년 일본 고치현에서 태어났고 한국이 일본에 강점되던 1910년 5월 일본을 경악하게 만든 ‘천황암살미수 사건’, 소위 대역사건의 주모자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메이지시대 사회주의운동의 중심인물이었던 고토쿠가 연루된 대역사건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자들을 탄압한 사건으로 밝혀져 있다. 이 사건으로 일본에선 사회주의자들의 대대적인 검거열풍이 일었고, 이로 인해 메이지시대 사회주의 운동의 맥이 끊길 정도였다.

  고토쿠 슈스이가 사상가로 활동을 시작한 1890년대 말~1900년대 초반은 가토 히로유키의 <인권신설>이 일본 지식인사회에서 사회진화론의 기본틀로 널리 유통되던 시기였다. 훗날 사회주의자에서 아나키스트로 전향하는 고토쿠 슈스이가 사회진화론을 수용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진보를 주장했던 이유야말로, 메이지시대 이후 국가주의를 향해 달려가던 일본사회에서 서양의 과학이 보여주는 정수를 통해,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내려했던 과학적 사회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다. 고토쿠 슈스이의 과학적 사회주의는, 근대 일본을 이해하는 잃어버린 고리인지 모른다.

김우재, 낯선 과학자


<필자> 김우재 교수
- 중국 하얼빈 공과대학교 생명과학센터 조교수
- 포항공과대학교 생명과학과 박사
- 저서 <플라이 룸>, <선택된 자연> 등
- 동아사이언스, 한겨레 등 다수 매체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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