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한 항구도시 산책, 사세보

나가사키의 북쪽에 붙어 있는 작은 항구도시 사세보. 낯선 이름만큼이나 아는 것은 없지만, 도시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밀려오는 조용한 분위기가 여행자의 마음을 가볍게 흔들어 놓는다. 특별히 화려한 것은 없었지만 하루 반나절 사세보를 천천히 걸어본다.


햇빛이 가득 내리비치는 부둣가에는 시민들과 여행자가 뒤섞여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고, 바다에는 거대한 크루즈 선이 정박한 채 승객들을 쏟아내고 있다. 길을 따라 걸어가면 사세보 시민들의 삶에 한 발짝 디딜 수 있는 아케이드 상가가 있고, 깃발을 휘날리는 군함을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공원, 그리고 숨어 있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신사까지. 가볍게 커피 한잔을 하고, 유명하다는 먹거리로 배도 두둑하게 채우며 오로지 두 발로 항구 주변을 자박자박 걸었다. 그것만으로도 꽤 나쁘지 않은 여행이지 않은가.

사세보 씨사이드 파크에 설치된 조형물


바다와 쇼핑몰, 사세보 5번가


햇빛이 수면에서 아름답게 부수어지는 따듯한 정오 시간. 저 멀리 스타벅스가 먼저 눈에 띄었다. 저마다 뜨거운 태양을 맞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아마도 그 느긋함은 눈 앞에 펼쳐지는 푸른 바다 덕이 클 것이다. 시작은 츠타야서점과 스타벅스. 일본어를 전혀 모르더라도 서점은 늘 좋은 관광지가 된다. 낯선 글자들 사이에서 발견하는 기념품이 있을지도 모르니 말이다.

바다 앞에 자리하고 있는 쇼핑몰의 모습

사세보 5번가는 도시의 분위기를 닮은 듯 화려하지 않은 외관의 쇼핑몰이다. 프롬나드 동쪽 관에는 1층부터 3층까지 각각 다른 테마의 매장들이 자리를 잡는다. 1층에는 맛있는 냄새를 풍기는 다양한 먹거리 상점과 기념품숍, 카페, 잡화점이 있다.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무인양품도 꽤 큰 규모의 매장으로 들어서 있다. 2층에는 의류와 액세서리를 판매하고 3층은 키즈 매장이 여럿 자리한다.

쇼핑을 즐기는 여행자라면 이곳에 들러 꼼꼼히 둘러보며 시간을 보내기에 좋지 않을까. 식당과 카페, 숍이 한 공간에 모여 있으니 말이다. 또한, 야외로 나가면 바로 앞에 호수처럼 잔잔하게 찰랑거리는 바다까지. 정오가 지난 뒤에는 몇몇 사람들이 부둣가 근처에 앉아서 멍하니 풍경 감상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나 역시도 그곳에 앉아 먼바다를 보게 된다.

부둣가에서 여유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세보 시민들


조용히 활기찬 욘카초 상점가


일본 도시 대부분에는 아케이드로 이루어진 직선의 상가가 있다. 일본 여행을 가면 이 상점가를 꼭 걷는다. 마치 스스로의 여행 규칙이라도 되듯 말이다. 욘카초 상점가는 조용하지만 활기찬, 그런 분위기가 있다. 하나둘씩 문을 열기 시작한 상점들과 골목골목에서 나타난 시민들. 매대에 야채를 가득 늘어놓고 판매하는 채소가게에서 열심히 물건을 고르는 노인을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참 평화로워졌다.

욘카초 상점가의 모습

인터넷에서 알려지지 않은 이 도시만의 맛집 또한 상가를 걷다 보면 자연스레 발견하게 된다. 사람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거나 밖으로 길게 줄을 서 있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다. 평범한 카페에 들러서 커피 한잔을 하거나 끝까지 걷다가 골목으로 빠져나가거나. 욘카초 상점가는 걷기 여행을 즐기는 이들에게 매력적인 장소임이 틀림없다.


사세보의 명물, 빅맨


사세보의 명물 빅맨 버거집

사세보에서 유명한 먹거리가 무엇일까, 알아보니 의외로 햄버거가 나왔다. 햄버거는 미국이 원조이지 않은가 했는데 역시에 여기에도 사연이 숨어 있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 미국 해군이 사세보 기지를 점령했었다. 그 덕에 사세보는 당연히 미국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사세보 버거가 탄생한 것이다. 일본산 소고기 패티와 풍부한 야채, 그리고 부드러운 번까지. 버거러버들이라면 꼭 먹어봐야 한다기에 욘카초 상점가 인근의 빅맨을 찾았다.

그중에서도 빅맨은 사세보 3대 버거집 중 가장 유명한 식당이었다. 유쾌한 분위기를 전하는 간판은 사세보 버거 캐릭터다. 어쩐지 익숙한 느낌이 든다 싶었는데, 호빵맨 작가 야나세 타카시 작가가 직접 그렸다고 한다. 점심시간이 지난 후 도착해서인지 사람은 많지 않았지만 좁은 가게 안에 잔뜩 쓰여 있는 낙서들이, 이곳의 유명세를 짐작하게 했다. 가장 많은 재료가 들어간 첫 번째 버거를 주문했다.

수제 패티와 수제 번, 그리고 수제 베이컨으로 만든 사세보 버거

두툼한 패티와 양상추, 계란후라이와 두께감이 있는 직접 만들었다는 수제 베이컨과 수제 번까지. 사세보 버거의 인증을 받은 도시의 모든 버거집은 모두 각자의 빵과 패티를 만들어 판매한다고 한다. 한입 베어 물기에도 큰 버거를 허겁지겁 먹었다. 따듯하고 두툼하고, 양도 많다. 수제 패티와 베이컨은 육즙과 맛, 향이 기대 이상이었다. 여기에 시원한 아사히 생맥주까지 곁들이니 오랜 걸음에 쌓인 피로가 확 풀어진다.



마을 뒤에 숨어 있는 미야지다케 신사


나무가 잔뜩 우거진 미야지다케 신사로 향하는 길

순전히 걷다가 발견한 미야지다케 신사는 붉은색 토리이가 아닌 거대한 회색 돌로 만든 토리이가 계단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토리이가 있으니 그 길을 따라가면 신사가 나오겠구나 싶어서 계단을 올랐다. 그렇게 걸음을 옮기다 보니 인적 없는 신사가 나타난 것. 버려진 느낌은 전혀 없었다. 소중히 다뤄서 깨끗해진 공간을 보는 기분이었다. 대나무로 둘러싸인 우물을 지나 안으로 천천히 들어가니 생각보다 큰 규모의 경내가 나타났다.

인적이 드문 신사의 경내

잔뜩 우거진 나무 덕분에 신사는 한적해 보였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바람에 살랑이는 이파리 소리뿐. 경내에는 부적 등의 기념품을 파는 매대에 무녀가 가만히 앉아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종종 오는 곳인지 소원을 적어 엮은 종이와 거대한 종도 보였다. 일본 신사 특유의 단정하고 깔끔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일본의 유명하고 웅장한 신사보다도 미야지다케 신사가 더 신비롭게 느껴졌다.



글 | 사진 : 엄지희
저작권 : 벡터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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